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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이야기

분명 들어보긴 했는데 (1) -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

 

정몽구 회장 캐리커처

대한민국 재계 순위 2위의 현대그룹

그중에서도 그룹을 리딩하는 현대자동차의 2대 회장 정몽구의 스토리에 대해 알아보자

 

현대 그룹 가계도

 

오늘 이야기의 주요 인물은 삼촌 故정세영, 1남 故정몽필, 5남인 故정몽헌, 

 

정몽구 회장은 故 정주영 회장의 2남으로 태어났다

 

공부 잘하는 자식을 끔찍이도 아낀 정주영 회장

 

 

 

 

 

 

 

그러나 정몽구 회장은 경복고 럭비부로 한 학년 유급까지 한다

 

유달리 쾌활하고 도전적인 스타일의 정몽구 회장과 달리

 

다른 형제들은 모두 학업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여줬다

 

정몽헌 회장

 

故 정몽헌 회장은 그중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아들이었다

 

연세대학교를 수석 입학, 수석 졸업하며 영어도 유창하게 구사했기 때문이었다

 

80년대 후반, 아버지 정주영 회장은 가족들을 모아놓고 5남 정몽헌이 현대를 이끌 것이라고 호언을 놓기도 했다 - 비화

 

 

마음이 상한 정몽구 회장이었지만

 

현대자동차의 부품 과장부터 시작해 24시간 정비를 배웠다

 

A/S파트에서 고객들의 클레임을 몸으로 겪고 품질에 대한 중요성을 깨달았다.

 

코티나

 

특히, 포드사와 합작한 코티나에 대한 고객들의 불만에 정몽구 회장은 큰 충격을 받고 품질 개선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후 자동차 사업이 잘되며 현대 정공을 설립했다.

(현대 정공 -> 현대 모비스)

 

故정세영 회장

 

문제는 현대자동차를 30년간 이끈 삼촌 정세영 회장이다

 

아버지 정주영 회장으로부터 인정받기 시작한 정몽구 회장이었지만, 삼촌이 일궈놓은 텃밭을 함부로 갈 순 없었다

 

그렇기에 현대자동차와 동종의 차량을 손댈 순 없었다

 

현대정공 갤로퍼

 

그렇게 고안해낸 차량이 바로 현대정공의 갤로퍼이다

 

정몽구 회장으로선  승용차를 손 댈 수 없었기에, 현대에는 없던 4륜 구동 SUV를 선택하게 되었다

 

차량 기술 획득을 위해 일본의 미쯔비시 그룹까지 찾아가 벤치마킹을 하며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1991년 출시 후, 쌍용의 코란도가 지닌 아성을 무너뜨리며 91년 '올해의 차'를 차지한다

 

 

정주영 회장은 점점 정몽구 회장을 아끼게 되고

 

현대자동차를 물려주기 위해 정세영 회장을 불러 설득하게 된다.

 

30년간 현대자동차를 이끌어온 정세영 회장이 물러나며 씁쓸하게 남긴 한 마디

 

우리 조카(정몽구) 자동차를 많이 알잖아

 

 

1997년 기아자동차가 부도난 이후

 

대기업들은 매물로 나온 기아차를 인수하기 위해 물밑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문제는 인수하기엔 부담스러운 크기, 자칫하면 현대자동차의 아이덴티티를 잃을 수도 있다

 

 

당시 끙끙 앓던 정세영 회장 너머로 정주영 회장은 책상을 치며 호통을 친다

 

아버지의 불호령에 정몽구 회장은 기아자동차에 거액을 배팅하며 인수에 성공한다

 

98년, 결국 재계 순위 7위의 기아자동차가 현대자동차 그룹으로 넘어간다

 

해당 토크쇼와 무관합니다

당시 글로벌 완성차 시장은 몸집 키우기가 중요한 시점이었다.

 

다임러도 크라이슬러에 인수된 시기, 사업의 확장에는 품질 이슈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미국의 한 토크쇼에서 현대자동차의 품질 문제를 조롱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우주에 나가있는 비행사들이 현대 부품을 쓰다가 지구에 돌아오지 못 할 수도 있겠다

 

 

부품 파트에서 자동차 인생을 시작한 정몽구 회장의 입장에서 품질 이슈는 큰 치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몽구 회장이 실시한 품질 경영 10만 마일/10년 보증

 

GM과 포드는 경악했다. 정몽구 회장의 결단과 뚝심만큼은 누구도 폄하할 수 없다.

 


문제는 2000년 왕자의 난으로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마음에선 장남 정몽구아끼는 정몽헌 사이에서 확실한 현대그룹의 리더가 정해지지 않았다.

 

 

정주영 회장 소떼 방북

 

왕자의 난은 소떼 방북으로 결판이 났다.

 

故정주영 회장의 대북사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정몽구 회장

 

반대로, 소떼 방북에 찬성하며 북한까지 따라간 정몽헌 회장.

 

아버지 정주영은, 대북사업의 같은 편에 선 정몽헌 회장을 현대 그룹의 리더로 세운다

 

 

 

회장직에서 정몽구의 이름을 빼라고 지시.

 

그러나 자동차를 손에서 놓을 수 없던 정몽구 회장은

 

그룹에서 독립하여 현대자동차를 키우겠다는 결심을 한다.

 

이후 현대 자동차를 "품질 경영, 현장경영"으로 이끌기 시작한다.

 

그렇게 출시한 차량이 아반떼, 소나타, 그랜저

 

2008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로 1보 후퇴를 선택한 글로벌 기업들, GM과 크라이슬러는 정부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 정몽구 회장은 오히려 생산 증대, 품질 개선으로 위기를 극복한다

 

현대자동차의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12년전 아버지의 결단을 본받아 현 코로나 사태에 대응하여 생산량 증대 전략을 실행하고 있다

 

당시 정 회장의 놀라운 선택으로 현대자동차는 글로벌 차량 판매 5위에 등극한다

 

 

정몽구 회장의 마지막 사업은 현대 제철.

 

당시 대한민국에서 철을 가장 많이 쓰는 기업으로서, 철재 조달은 기업 생산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부품 공급의 대부분을 담당한 포스코가 공급량을 쥐락펴락하며 현대를 속 썩이던 상황이었기에

 

제철사업은 아버지 정주영 회장시기부터 매달렸던 숙원사업이이다.

 

당진제철소

 

마침 한보철강이 당진제철소에서 후퇴하며 매물이 나오던 시기,

 

정몽구 회장은 10조를 배팅하며 한보철강과 제철소를 흡수한다

 

그렇게 현대자동차를 위한 모든 퍼즐이 맞춰졌고 아버지의 그림자를 넘기 위한 정몽구 회장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제철소 개공식날, 정몽구 회장은 아버지 정주영 회장의 손을 잡고 공장을 둘러본다

 

당시 제철소를 둘러보며 정주영 회장은 매우 흐뭇해했다고 한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전략.

 

만약 '지금 같은 시기에 왜 현대자동차는 생산량 증대를 택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 독자분이 있다면,

 

또한 자소서와 면접에 어떤 이야기를 쓸 지 감이 안오는 독자분이 있다면,

 

이런 전략의 배경, 기업의 스토리를 풀어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라 믿는다